한국 축구 '금메달=병역 면제' 생각 버려라
지금으로부터 41년전인 1977년 9월11일 한국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가 벌어졌다. 장소는 서울운동장(지금은 없어진 동대문운동장), 무대는 제6회 박대통령컵 국제 축구대회였다. 이 대회에 참가한 당시 축구대표팀 1진 '화랑'은 예선 첫 경기에서 당시 '아시아 최강'으로 평가받던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기적 같은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서울운동장 내 스탠드의 시계가 후반 38분을 가리키던 시점에 '드라마'가 시작됐다. 1-4로 크게 뒤진 채 끌려가던 한국이 공격수 차범근의 막판 해트트릭을 앞세워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차범근은 후반 38분.42분.44분에 연속 득점하며 패색이 짙던 경기를 4-4 무승부로 바꿔놓았다. 자신감이 살아난 화랑은 인도와 싱가포르, 뉴질랜드를 연파하며 결승에 올랐고, 결승전에서 브라질(상파울루주 선발팀)과 0-0으로 비겨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축구대표팀의 경기를 보면서 '7분의 기적'을 회상하는 올드팬들이 많다. 지난 17일 조별리그 말레이시아전(1-2패)과 20일 키르기스스탄전(1-0승)을 지켜본 뒤 주요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축구 기사에는 "말레이시아와 축구 경기를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볼 날이 다시 올 줄 몰랐다"라거나 "이번에 키르기스스탄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한국 축구가 40년 전으로 후퇴한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넘쳐났다. 말레이시아는 8월 현재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64위, 키르기스스탄은 92위다. 객관적 전력에서 한국(57위)과 격차가 크다. 키르기스스탄전에서 한국은 손흥민(토트넘), 황희찬(잘츠부르크), 황의조(감바 오사카), 이승우(헬라스 베로나) 등 이른바 '최정예 공격진'을 가동하고도 단 한 골에 그쳤다. 90분간 26차례의 슈팅을 시도했지만, 그중 상대 골대 안쪽으로 향한 유효 슈팅은 8개뿐이었다. 그 중 단 한 개(후반 18분 손흥민 골)가 득점으로 이어졌다. 국가대표가 즐비한 공격진으로도 키르기스스탄의 23세 이하 어린 선수들이 채워놓은 자물쇠를 제대로 풀지 못했다. 아시안게임 준비 과정에서 우리 대표팀이 의도적으로 수비 훈련에 치중한 것이 독이 됐다는 지적이 많다. 김학범 감독은 파주에서 소집 훈련을 진행하며 "수비진에겐 조직력과 약속된 움직임이 필수적이지만 공격수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창의성"이라면서 "우리 골잡이들이 각자의 득점 본능을 마음껏 살릴 수 있도록 패턴 플레이는 가급적 활용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23세 이하 선수들과 와일드카드 황의조가 손발을 맞춘 바레인전 전반에는 대량 득점(5골)했지만, 손흥민.황희찬 등 A대표팀 공격수들이 전방에 포진하면서부터 오히려 득점력이 떨어지는 모습이다. 지각 합류해 손발을 맞춰볼 시간이 많지 않았던 데다, 훈련의 초점이 수비 조직력에 맞춰진 탓에 창끝을 가다듬을 기회가 부족했던 게 원인으로 꼽힌다. 현재로선 경기를 거듭하며 팀워크와 실전 감각을 함께 끌어올리는 것이 급선무다. 선수단 내부 분위기에서 부진의 이유를 찾는 시각도 있다. 대한축구협회의 한 관계자는 "금메달이라는 공통 목표 아래 선수들이 함께 도전하고 있지만, A대표팀 출신 선수들과 23세 이하 대표팀 선수들 사이에 이따금 어색한 기류가 감지된다"면서 "대회 직전 급히 팀을 구성했으니 삐걱대는 부분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수준으로 적절히 통제하는 게 과제"라고 말했다. 그래서 김학범 감독뿐만 아니라 '캡틴 손흥민'의 리더십이 필수적이다. 손흥민은 기성용(뉴캐슬 유나이티드)의 뒤를 이어 A대표팀의 차세대 주장으로 거론되는 선수다. 아시안게임 대표팀을 이끌며 체득한 경험이 앞으로 A대표팀에서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키르기스스탄전 직후 손흥민은 "아직 주장으로서 부족한 게 많지만, 선수들을 이끌고 나도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이겠다"면서 "16강 이후부터는 패배하는 순간 도전이 끝난다. 결국 약한 팀이 먼저 집에 가는 거다. 선수들에게 그 부분을 강조하겠다"고 말했다. 손흥민의 말처럼 더 이상의 시행착오는 허용되지 않는다. 오늘 맞붙는 이란과의 16강전을 비롯, 이제부터는 매 경기가 벼랑 끝 토너먼트 승부다. 이란을 이기더라도 강력한 우승 후보 우즈베키스탄과 '결승전 같은 8강전'을 치러야 한다. 전술적.심리적으로 심기일전의 각오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선수들이 금메달을 갈망하는 이유가 '병역 면제'라는 '제사밥'에 모아지지 않길 바란다. '땅에 떨어진 한국 축구의 자존심을 되살린다'는 순수한 각오와 의지가 서로의 희생과 단합을 이끌어내고, 대회 2연패에 한발 다가서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